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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隆中随笔

    2017-08-04

    今年5月初,随队去了湖北,以往走湖北,都是游三峡寻武当,这次不同,专走革命老区,三国之路,值得一说的是襄阳的古隆中,到了这里才发觉三国知识之匮乏,真不该苦读金瓶梅而没有好好看看三国志,仅存在脑中的一点印象还得拜托易中天。当即跟老领导们表示,回去一定恶补。

    올해 5월초 팀을 따라 호북(湖北)에 갔는데 예전에 호북에 가면 항상 삼협(三峡)과 무당(武当)을 찾았었지만 이번만은 달리 혁명노구(革命老区), 삼국지로(三国之路)만을 찾았으며 특히 이번 양양(襄阳)의 고융중(古隆中)을 찾아서야 자신이 삼국(三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점을 깨닫게 되였고 금병매(金瓶梅)만 열심히 읽고 삼국지(三国志)를 열심히 읽지 않은데 대하여 후회하게 되였고 머리속에 남은 조그마한 기억마저도 역중천(易中天)에게 의존할수밖에 없었다. 그 즉석에서 선배님들께 돌아가서 꼭 다시 삼국지를 열심히 학습하겠다고 다짐까지 하였다.   
       
    我们去的那天正好赶上大雨,雨中的古隆中屋舍俨然,修竹千杆,树影婆娑,秀水妩媚,荷叶随风和雨点摇摆,四周透着寂静,只有哗哗的雨声,不知为啥,这倾盆大雨让我觉得有些神圣,突然有种不知身处何世的感觉。

    우리가 찾아간 날은 마침 큰 비가 내려 비속의 고융중 건물들은 엄연하고 대나무가 우거져있었으며 나무가지가 움씰움씰 춤을 추고 있었고 깨끗한 물, 그리고바람과 빗물에 넘실넘실 춤을 추는 연잎, 주변은 고요한 정적에 다만 쭉쭉 쏟아져 내리는 빗소리에 이유없이 억수로 쏟아붓는 듯한 폭우가 성스러운 느낌까지 들면서 갑자기 자신이 처한 시대를 잊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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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眼前庭院错落,古树参天,松柏滴翠,淡雅幽静。据说诸葛亮青年时期在这里隐居长达数十年之久。

    눈앞에는 정원들이 들쑥날쑥 들어 앉아있고 오랜 나무와 송백(松柏)이 우거져 있어 아담하고 아늑한 느낌이 든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제갈량은 청년시기에 이곳에서 수십년간 은거하였다고 한다.
     
    导游是个土生土长的当地人女孩,她嘴里常说的一句话就是:三国故事湖北多,这可不是在吹牛。三国演义120回,其中的75回就发生在我们湖北,而这75回中又有44回发生在襄樊。我们问她襄阳的武侯祠是不是正宗,据说全国有7座被列为文物保护单位的武侯祠,河南南阳武侯祠的规模相当可以啊,小丫头显得有些激动。

    가이드는 현지 토박이 여자아이인데 말끝마다 삼국에 관한 이야기는 호북(湖北)이 가장 많은데 절대로 헛풍이 아니란다. 삼국연의(三国演义) 120회중 75회가 자신네 호북에서 발생한것이고 또 75회중 45회 또한 양양(襄樊)에서 발생한것이란다. 우리가 그녀에서 양양(襄阳)의 무후사(武侯祠)는 신토불이가 아니고 전국에만 보호문물로 지정된 무후사가 7곳이나 있고 하남남양 무후사(河南南阳武侯祠)는 규모도 크고 그럴싸하다고 하니 그녀는 약간의 격동된 표정을 금치 못한다.
     
       
    据史料记载,从古到今,为谁是诸葛亮正宗纪念地而发生过不少争执。其中尤以湖北襄阳古隆中和河南南阳卧龙岗两地的武侯祠谁为正宗之争最为有名。两地的武侯祠,历史悠久。隆中的建于晋代,保留着古朴的风貌;南阳的建于唐代,更显得宏大堂皇;两地都以诸葛亮的躬耕地自居,为武侯祠的正宗而争。为此,还打过不少笔墨官司。隆中派以《隆中对》之隆中为证,南阳以《出师表》臣本布衣,躬耕于南阳为证,争得不亦乐乎。直到清代咸丰年间,襄阳人顾嘉衡出任南阳做知府,但他这个官可就有点难做,这个官司就闹到他的堂前,可要处事公平,一碗水要端平,若是向着家乡,将武侯祠的正宗桂冠判给襄阳南阳百姓就叫他这个知府坐不稳。

    역사적 기재에 따르면 오랜 옛날부터 현재까지 어느곳이 진짜 제갈량의 기념지인가에 대한 쟁론은 끊이지 않고 있다. 그중에서도 호북양양고융중(湖北襄阳古隆中)과 하남남양와룡강(河南南阳卧龙岗) 이 두곳의 무후사가 어느곳이 정통(正宗)”인가의 쟁론이 가장 유명하다. 이 두 무후사는 역사가 유구하며 융중(隆中)의것은 진대(晋代)에 건축되여 소박하고 옛스러운 풍모를 보존하고 있고 남양(南阳)의것은 당대(唐代)에 건축되여 더우기 웅장하고 위엄스럽다. 이 두곳은 모두 제갈량의 궁경지()躬耕地라 자칭하며 자신네 무후사가 정통이라 다투고 있다. 이때문 수많은 필전과 송사를 벌여왔으며 융중파(隆中派)” <융중대(隆中对)>중의 융중(隆中)”을 증거로 내세웠고 남양파(南阳)” <출사표(出师表)>중의  “본포의, 궁경우남양 (臣本布衣躬耕于南阳)”을 증거로 내세우며 쟁론이 끊이지 않고 있다. 청대함풍년간(清代咸丰年间)에 들어서서는 양양(襄阳)인인 고가형(顾嘉衡)이 남양(南阳)의 지부(知府)직을 맡을 당시 난처한 일에 봉착하게 되였는데 바로 이 송사가 그의 당전(堂前)까지 오게 되여 편애없이 공정하게 되였고 만약에 고향을 편애하여 무후사의 정통계관(正宗桂冠)을 양양(襄阳)에게 판결한다면 남양()의 백생들이 가만히 있을리가 없어 지부(知府)의 자리도 지킬수 없는 상황에 봉착한 적이 있었다.  
       襄阳人认为,既然是家乡人到南阳为官,一定要为家乡人伸张正义,将古隆中的武侯祠判为正宗,否则不要他回家乡。两边互不相让,要等顾知府表态。顾嘉衡听了双方的意见,没有立即表态,拍案休堂,说是第二天再判。第二天一早,双方又来到府衙,等顾知府的评判,只见顾嘉衡拿出文房四宝,提笔写了一幅对联:心在朝廷原无论先主后主;名高天下何必辩襄阳南阳此联一出,双方心服口服,都佩服顾知府的才智,从此这场争论才告一段落。那么,诸葛亮躬耕之地究竟在何处呢?只要了解当时的历史地理知识,就不难辨别。隆中在汉时属南阳郡所管辖,于是诸葛亮便称自己躬耕于南阳。明代以后,隆中才划归襄阳,而襄阳南阳又分属湖北河南两省,因此才有了以上的争论。

    양양()인들은 고향사람이 남양(南阳)에서 관직을 맡은 이상 반드시 고향사람들의 정의를 위하여 고융중(古隆中)  무후사를 정통으로 판결할것이며 그렇지 않을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할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양측은 서로 꼬물만치의 양보도 없이 단지 고지부(顾知府)의 의사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양측의 의견을 들은 고가형은 즉시 의사를 밝히지 않고 판결을 중단하고 이틑날에 판결하기로 하였다. 이틑날 아침 일찍 양측은 다시 부아(府衙)에 모여 고지부(顾知府)의 판결을 기다리자 고가형이 문방사보를 꺼내들고 필을 들어 심재조정원무선주후주, 명고천하하필변양양남양(心在朝廷原无论先主后主名高天下何必辩襄阳南阳)”이라는 대련(对联)을 쓰자 그제서야 양측은 고지부의 재능과 지혜에 탄복하면서 그번 쟁론이 일단락 마무리하게 되였다 한다. 그럼 제갈량의 궁경지는 대체 어느곳에 있는것일까? 당시의 역사지리적 지식을 이해한다면 분별하기가 어렵지 않을것이다. 융중(隆中)은 한나라()때에 남양군(南阳) 관할에 속하였기에 제갈량이 자신이 남양에서 궁경하였다.( 躬耕于南阳)”고 한것이다. 명대(明代) 이후에야 융중(襄阳)이 양양(襄阳)에 귀속하게 되였고 양양()과 남양(南阳)이 각기 호북(湖北), 하남(河南) 두 성()으로 나뉘고 있었기에 상기 쟁론이 있게 된것이다.
     
       
    事实上,诸葛亮的躬耕之地只有一处,那就是古隆中。后来中国的专家小组在四川召开了一个研讨会,最终确定在襄阳古隆中,其实这是有很多依据的,我们暂且不说隆中对,首先从诸葛亮的人际关系说起,他的老师水镜先生先生,也就是三国演义中所提到的司马徽,就居住在我们襄阳南漳县城,故居仍然存在无可厚非;诸葛亮的同窗好友徐庶,就是三国演义中提到的一个被迫一身都在曹营中做官,然而却未跟曹操献一计,俗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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